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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축제가 끝났다. 이제 부처님 오신날이고, 쉴 수도 있다! (못 쉬는 분에겐 죄송!) 계절의 여왕이라는 오월에 나는 어떤 부류일지 생각해봤다.


1. 남들이 부러워 할 정도로 잘 논다. 

2. 할 일이 너무 너무 너무 많아서 놀고 싶었는데 참았다. 

3. 노는데 노 관심. 

4. 의지는 있으나 귀찮다.


음, 4번이다. 아무생각이 없기 때문에 아무생각이 없는 상태에 점점 중독되는 듯하다. 이럴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읽는 수필집을 읽으면  작가의 글이 내 일기인 것같아 “내가 이렇게 생각했지, 맞아, 나도 이렇게 쓸 수 있었는데 귀찮아서 안쓴것 뿐이야”라고 자기 합리화 할 수 있기에 괜시리 기분도 좋아진다. 또 이럴때 읽어야 하는 책이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 주인공이 소설이다. “음, 나의 말로가 이렇게 되겠군”이라고 예측하는 거다. 


아무생각 없는 상태에서 읽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수필집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이다. 저녁무렵에 면도한다는 뜻을 적확히 몰랐다. 수염이 안나는 여자니까 말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녁에 새 양말을 신는것과 비슷한 느낌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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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20대 여성 패션잡지<앙앙>에 수필를 연재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김훈이 쎄씨에 그의 단상을 연재하는 것과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키는 그의 주업이 장편소설 쓰기이고, 스트레칭하는 느낌으로 단편소설이나 에세이를 쓴다고 했다. 그는 ‘맥주회사에서 만든 우롱차’정도로 자신의 수필을 생각해 달라고 했다. 

이 수필들을 모은 책인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는 이탈리아 로마에서의 운전경험을 비롯해서 비행기에서 마시는 블러드메리, 사람들이 지라시 스시를 좋아하는 이유, 센트럴파크에서의 조깅, 왜 여성운동가들이 거들이 아닌 브래지어를 불에 태웠는지에 대한 궁금증, 감상한 영화와 음악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도 마찬가지이다. 아보카도의 숙성도를 맞추는 일이라든가, 오펜하이머의 천재성에 감탄한 일같은 신변잡기적 글이 실려 있다. 깃털만큼 가벼운 책. 그렇다고 만화나 다른 유머집같은것과 비슷한 건 아니고, 또 엄청나게 퀄리티가 떨어지는 연애소설같은 가벼움이 아니고, 뭐랄까... . 아무튼 장미란선수가 역기대신 아령을 들고 고찰한 느낌이랄까. 에잇 모르겠다. 암튼 별로 남는 건 없다.


일단 책에서 가장 슬펐던 수필을 꼽아보겠다. 제목은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하루키는 사랑하기 가장 좋은 나이를 열여섯에서 스물하나란다. 벌써부터 슬퍼지네. 이런저런 연애를 통한 감정의 기억은 몹시 소중하다고 말한다.


설령 나이를 먹어도 그런 풋풋한 원풍경을 가슴속에 갖고 있는 사람은 몸속 난로에 불을 지피고 있는 거나 다름없기 때문에 그다지 춥지 않게 늙어갈 수 있다. 그러니 귀중한 연료를 모아두는 차원에서라도 젊을 때 열심히 연애하는 편이 좋다. 

p171<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연료가 많은지, 적은지는 각자의 경험이 비춰 판단하길 바란다. 그러나 하루키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꼭 말을 들을 필요는 없다. 그는 대학 재학중인 23살에 결혼했으니 말이다. 그냥 자기가 못한 걸 남들보고 해보라는 것 같다. (<-순전히 내 생각이다)


또 나의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해준 수필이 하나를 소개하겠다. <가키피 문제, 뿌리가 깊다>라는 제목인데, 가키피는 일본의 과자이름이다. 매운맛인 감씨와 달달한 땅콩이 섞여 있는 과자이다. 예를 들어 담백한 건빵과 자글자글하고 달달한 별사탕 같이 상반된 맛이 함께 있어 하나의 간식을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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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세상에 ‘영구운동’은 존재하지 않으나 ‘영구운동 같은 것’은 존재한다고 한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가키피 먹기’다. (프링글즈 , 한번 열면 멈출 수 없어! 라는 광고카피가 생각났다.) 이렇게 훌륭한 식품인 가키피에도 문제가 있다. 타인이 개입하면 감씨와 땅콩이 줄어드는 균형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의 아내는 땅콩만 주로 먹는 편이라 감씨만 남게 되는데, 그게 참 곤란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키피를 먹을 때면 나는 내 안에 내재된 욕망을 최대한 억눌러 감씨와 땅콩을 되도록 공평하게 다루려 애쓴다. 내 안에 가키피 배분 시스템을 반강제적으로 확립하여 그 특별한 체계 속에서 삐뚤어지고 보잘 것 없는 개인적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다. 

p43<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내 친구와 팥빙수를 나눠먹을 때가 생각났다. 나는 너무 단팥은 싫어하고 우유 얼음을 좋아하지만 나의 팥빙수 배분 시스템을 돌려서 팥과 우유얼음을 적절히 섞어 먹는다. 그런데, 내 친구가 팥이나, 우유얼음을 집중공략해서 먹으면 그 하모니가 깨지고 괜시리 짜증이 난다. 삼겹살 배분 시스템(평소 야채를 먹지 않지만 배분 시스템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야채를 많이 먹는다) 같이 조화를 이룰떄 더 아름다워지는 것을 칭하는 ㅇㅇㅇ배분 시스템이라는 말이 내 맘에 쏙 들었다. 


결혼한 분들은 아마 이해할 거라 생각하지만 부부끼리 음식 취향이 다르다는 것은 아주 귀찮은 일이다. 우리 집의 경우는 보통 생선과 채소 중심으로 싱겁게 먹는 정도가 비슷하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래도 조리법이나 식재료 취향은 이것저것 다르다. 예를 들어 아내는 튀김이나 냄비요리를 전반적으로 좋아하지 않아서 결혼하고 지금까지 그런 건 일절 만들어주지 않는다. '삶의 방식'을 거스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니 반론의 여지가 없다. 부부라고는 하지만 "삶의 방식을 거슬러줘"라고 차마 못한다. "그럼 당신도 한가지 삶의 방식을 거슬러줘"라고 하면 상당히 곤란하니까. p168<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그렇다. 배분시스템을 지키지 않는더라도, 참아야 한다. 각자의 배분시스템을 다른거니까. 


아무튼 정말 아무 생각없이 국수처럼 후루룩 읽을 수 있다. 소설에서 추측해 볼 수 있는 하루키의 모습과 매우 다르다. 또 아주 사소한 것에 대한 관심과 궁금증을 보고 있노라면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아무생각없는 보잘것 없는 나라도.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이란 채소나 다름없다.”라고 누군가 단호히 말하면 무심결에 “그런가”하게 될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채소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채소마다 마음이 있고 사정이 있다. ...(중략)... 뭔가를 하나로 뭉뚱그려서 우집는 건 좋지 않군요. 

P15<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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